(시사저널=김형준 SPOTV 메이저리그 해설위원)
타자는 득점을 올리고, 투수는 아웃을 잡는다. 야구의 기본을 설명한 이 문장에서 빠져 있는 부분은 투수를 도와 아웃을 잡아내는 야수의 존재다. 투수가 혼자 힘으로 해내는 탈삼진은 전체 아웃의 3분의 1 정도로, 나머지는 야수의 도움이 필요하다.
1966년 LA 다저스에는 샌디 쿠팩스와 돈 드라이스데일이라는 최고의 원투펀치가 있었다. 다저스는 홈런 파워가 떨어지는 대신 번트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출중했다. 하지만 다저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볼티모어에 패했다. 다저스 월터 올스턴 감독이 밝힌 패인은 "번트를 대지 못해서"였다. 볼티모어의 3루에는 '인간 진공청소기'라는 별명을 가진 브룩스 로빈슨이 있었다. 로빈슨이 따낸 16개의 골든글러브는 투수를 제외한 야수 전체 1위에 해당한다.
9월16일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2루수 김하성이 안타를 받아내고 있다. ⓒAP 연합홈런·타점 지상주의에서 벗어난 MLB, 명수비수에게 MVP 수여
역대 최고의 유격수 수비를 자랑한 오지 스미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오즈의 마법사'로 불렸다. 스미스는 통산 13개의 골든글러브 수상으로 로빈슨 다음으로 많았지만, 19년을 뛰면서 기록한 홈런이 28개일 정도로 장타력이 떨어졌다. 스미스는 1989년에도 홈런을 두 개밖에 때려내지 못했다. 반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케빈 미첼은 47홈런·125타점을 기록하고 홈런왕과 타점왕이 됐다.
1989년 스미스와 미첼 중 팀에 더 큰 기여를 한 선수는 스미스였다. 스미스의 대체선수 대비 승리(이하 승리 기여도)가 7.3인 반면 미첼은 6.9로 스미스가 앞섰다. 스미스가 명품 수비로 무수한 실점을 막아낸 반면, 미첼의 불안한 외야 수비는 추가 실점을 불러온 탓이었다. 하지만 수비의 중요성이 간과된 그 시절에는 홈런과 타점이 많아야 최고로 평가됐다. 미첼이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한 반면, 스미스는 한 표도 받지 못했다.
기록의 스포츠임을 자부하는 야구의 오랜 고민은 공격에 비해 수비의 기여를 객관화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0대15로 뒤진 9회말에 투런 홈런을 친 선수에게는 2타점이 올라가지만 1대0으로 앞선 9회말 1사 만루에서 끝내기 안타가 될 타구를 잡고 승리를 지켜낸 야수에게는 마땅한 기록 보상이 없었다. 공격에서도 그 전의 과정은 무시된 채 타점이라는 열매를 따는 선수에게만 찬사가 돌아갔다. 하지만 통계와 기술의 발달로 야구장에서 선수가 하는 모든 플레이에 가치를 매길 수 있게 되면서 홈런·타점 지상주의에서 벗어났다. 2016년 29홈런·100타점을 기록한 마이크 트라웃이 42홈런·127타점을 기록한 에드윈 엔카나시온을 제치고 MVP를 차지한 장면은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AP 연합수비의 가치를 간과하지 않는 시대에 뛰고 있다는 점은 김하성에게는 큰 축복이다. 2021년 8홈런·6도루, 2022년 11홈런·12도루였던 김하성은 올해 17홈런·38도루를 기록했다. 38개 도루는 내셔널리그 5위에 해당한다. 팀에서 가장 혹독한 출장을 하고 있던 탓에 막판 체력 저하가 찾아와 팀 최초의 20홈런·40도루를 달성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보상도 충분히 찾아왔다. 다년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올 시즌 대활약에도 김하성의 내년 연봉은 800만 달러다. 하지만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김하성은 팀 동료들의 투표로 최고의 모범을 보여준 선수에게 주는 '하트 앤드 허슬 어워드'를 수상했다. 지난해 유격수에 이어 올해는 2루수와 유틸리티에서 골든글러브 최종 3인에 들었고, 슈퍼스타 무키 베츠(LA 다저스)를 꺾고 유틸리티 부문 수상자가 됐다. 아시아 내야수의 수상은 역대 최초였다.
김하성은 공격 기여도가 내셔널리그 야수 중 16위였다. 수비 기여도는 그보다 더 뛰어나 7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김하성의 승리 기여도 5.8은 내셔널리그 전체 야수 중 7위에 해당한다. 메이저리그에서 승리 기여도 1.0을 700만 달러로 책정하고 있어, 올해 김하성은 4060만 달러에 해당하는 활약을 한 셈이다. 김하성의 올해 연봉은 700만 달러다. 자기 몸값의 6배를 해내는 선수가 되다 보니 겨울 이적시장에서의 인기도 대단하다. USA투데이는 후안 소토가 아닌 김하성을 샌디에이고 구단이 보유한 최고의 트레이드 카드로 꼽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2023 골든글러브 내셔널리그 유틸리티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김하성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공식 SNS내야 모든 포지션을 평균 이상 해낼 수 있는 전천후 수비 능력
김하성의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야의 모든 포지션을, 그것도 평균 이상으로 해낼 수 있는 전천후 능력 덕분이다. 김하성을 욕심낼 수 있는 팀인 보스턴의 경우 잰더 보가츠와의 결별에 대비해 트레버 스토리와 6년 1억4000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실제로 보가츠는 샌디에이고로 이적했다.
문제는 한때 골든글러브급 유격수였던 스토리의 송구 능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토미존 수술을 받고 돌아와서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보스턴이 김하성을 데려간다면 스토리에게 유격수, 김하성에게 2루를 맡기고 시즌을 시작한 다음 스토리의 송구 문제가 여전할 경우 둘의 자리를 바꿔주면 된다. 또한 보스턴은 정상급 공격력을 자랑하지만 수비 문제가 심각한 라파엘 데버스가 있기 때문에 유격수·2루수·3루수를 모두 잘 보는 김하성이 탐날 수밖에 없다.
김하성의 트레이드 가치가 높다는 건 역설적이게도 트레이드가 쉽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샌디에이고는 다저스처럼 큰 시장을 가지고 있지 못함에도 공격적인 투자를 멈추지 않았던 피터 사이들러 구단주가 혈액암 투병 과정에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올해 연봉 총액이 뉴욕의 두 팀인 메츠와 양키스 다음으로 많았던 샌디에이고는 연봉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팀 최고의 타자지만 내년 연봉이 3300만 달러에 달하는 후안 소토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고 선발투수와 바꾸기를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김하성을 내보내면 팀의 연봉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샌디에이고는 내년에도 많은 돈을 써야 하기 때문에 성적을 포기할 수 없다. 김하성에게도 내년은 중요한 해다. 내년이 4년 2800만 달러 계약의 마지막 해인 김하성은 구단과 상호 동의가 이루어지면 800만 달러를 받고 2025년에도 샌디에이고에서 뛸 수 있다. 하지만 몸값이 크게 올라갔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고 FA 시장에 나오는 게 유리하다.
1년 전 슈퍼스타인 잰더 보가츠가 샌디에이고에 합류하게 됐을 때 많은 사람은 김하성이 유격수가 보장된 팀으로 떠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김하성은 샌디에이고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고 했고, 증명해 냈다. 이로써 김하성은 유격수 수비도 뛰어나지만 2루수와 3루수로서도 뛰어난 수비를 할 수 있는 선수라는 더 값진 평가를 받게 됐다. 이제 메이저리그는 김하성의 가치를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