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 조수혁의 '베리나히쑤 티셔츠를 강조하는 주민규(울산현대). 김정용 기자
스스로 밑바닥부터 올라왔다고 생각하는 선수는 매 순간 유독 절실하다.
주민규가 그런 경우다. 이미 하부리그 우승과 개인상은 충분하지만, 선수에게 최고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대표 선발과 1부 우승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올해 비로소 K리그1 정상을 맛본 주민규는 첫 우승에 대한 간절함과 더불어 홍명보 감독에 대한 대량의 존경을 털어놓기 바빴다.
우승 확정 후 울산 클럽하우스에서 주민규를 만났다. 친하게 지내는 '유관' 멤버 조수혁, 김기희 등과 달리 주민규는 최근까지 '무관'이었다. 그는 우승 순간에도 동료들의 무덤덤한 반응을 보며 얼떨떨했다고 이야기했다. 이하 일문일답.
- 울산에 올 때 무조건 우승밖에 없다는 각오를 밝힌 바 있는데, 마침내 목표를 달성하셨어요. 축하합니다. 그동안 제주유나이티드에서 K리그2 우승을 경험했고 K리그1 득점상 등 개인상은 있었지만 흔히 말하는 메이저 트로피는 처음입니다. 고양에서 2013년 경력 시작해 11시즌 만인데, 정상에 오래 있었던 선수들과는 감흥이 남다를 것 같아요.
많이 다르죠. 어렵게 시작했다보니까. 항상 꿈은 꿨어요. 현실로 이뤄질 거라는 희망을 갖고 노력한 것들이 결실을 맺은 한해 같아요. 11년간의 프로 생활이 스쳐지나갔어요.
- 진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어요?
와, 우승했구나! 이 기분이 3초 정도 저를 지나갔어요.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까 다들 보통 1승 정도의 분위기인 거예요. 오늘 우승 아닌데 내가 계산을 잘못했나 싶을 정도였고요. 그래서 3초 만에 그 기분이 없어져버렸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실감이 안 나요. 아직 우승컵을 안들어서 그런가 지금은 무덤덤해졌어요. 나만 우승하고 싶었던 건가.
- 우승 할 줄 아는 동료들은 준비 과정부터 다르던가요?
(김)기희 형이 생각보다 우승을 많이 했더라고요. 7번째라고 그랬나? 시즌 준비 때부터 뭔가 여유가 있어요. 기희 형, (조)수혁이 형, (김) 성준이 형과 한 방을 썼는데. 저는 울산 첫해기도 하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반면 형들은 여유 있게 준비했어요. 이 시기에는 이 정도 하면 된다고 착착 하는 걸 보면서 '아 저러면 안 될 텐데' 싶어서 심지어 '이렇게 해서 우승하겠냐'고 이야기도 했어요. 그랬더니 형들이 '다 된다' 하더라고요. 뭔 자신감인가 싶었는데 지금 돌아보니까 경험이 있으니 어떻게 준비하는지 잘 알았던 것 같아요. 저는 못해본 거니까 간절하게 매일 죽어라 한 거고.
- 이젠 우승하는 요령을 전수받으셨나요?
여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니죠. 열심히 하는데, 노력할 때와 쉴 때를 잘 분배해요. 저는 쉴 때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해 왔어요. 쉴 때도 긴장상태였죠. 올해 울산으로 돌아왔는데 영입 발표 영상부터 배 타고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모습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면서도 부담이 있었어요. 보답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일년 내내 있었죠. 그런데 경험 있는 선수들을 겪어보니까 어떻게 시즌을 끌고 가는지 배운 것 같아요.
- 주도하고 점유율 높은 강팀에서 뛰는 주민규는 많은 사람들이 처음 봤습니다. 전소속팀 제주는 강팀이어도 공 소유 시간이 비교적 짧아서인지, 올해 비로소 주민규의 볼 키핑 능력을 알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흔히 쓰는 표현으로 '등딱(등지고 공을 지키는 플레이)' 능력이 이렇게 좋은 줄 처음 알았다고요. 사실은 미드필더에서 공격수로 전향했을 때부터 늘 이런 스타일이었잖아요.
저는 그런 플레이를 좋아하고 제주에서도 그렇게 플레이할 때가 많았는데. 사실 이만큼 관심 받은 적이 처음이다보니까 좀 더 많은 분들이 보신 것 같아요. 제 장점은 물론 찬스 있을 때 골로 연결하는 거지만, 상대가 밀어도 넘어지지 않는 건 몸싸움을 좋아하고 포지션상 제 역할이니까 꼭 해야 하죠.
주민규(울산현대). 서형권 기자
- 올해 유튜브 쇼츠(숏폼 영상)에 주민규 볼키핑 스페셜 영상 같은게 생기고 화제도 됐어요. 본인 영상 보세요?
굉장히 많이 보고요. 쇼츠에 많이 나오게 이런 플레이를 늘려야겠구나 생각하죠. 그러다가도 경기장 들어가면 '일단 이겨야 돼 우승부터야'라는 생각으로 바뀌긴 하는데. 여유가 좀 더 생긴다면 영상도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국내에서만 뛴 선수치고 꽤 다양한 스펙트럼의 감독을 겪어 봤는데요. 영국인 마틴 레니 전 서울이랜드 감독, 그리고 양극단의 리더십에 있는 김태완 전 김천상무 감독과 남기일 전 제주유나이티드 감독을 모두 접했습니다. 그렇다면 홍명보 감독의 특징은 뭔가요? 왜 이 이름을 거론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시죠?
혹시 감독님 계신가 해서요. 말 잘 해야…. 어흠. 제가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건 여태 감독님 같은 지도자를 본 적이 없고, 이제라도 만나서 굉장히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지도자들께 축구를 많이 배웠는데 홍 감독님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에 대해서도 배워요. 만약 제가 지도자가 된다면, 감독님 곁에서 배운 걸 바탕으로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생각할 정도. 아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요. 최고의 지도자이자 멘토인 것 같아요.
- 극찬인데요? 이 정도의 표현은 오랜만에 듣는데.
저는 어디 가서도 선수들에게 '너도 감독님과 해봐야 하는데 안타깝다'고 하거든요.
- 그건 놀리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다들 짧게라도 감독님에게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말씀 하나하나가 명언이고요. 그리고 전술적으로나 상황에 맞게 하시는 말씀들이 귀에 꽂혀요. 말의 힘이 명확하게 전달되니까 이행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지도자가 되면 똑같이는 못 해도 따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 홍 감독은 명언 제조기로 유명한데요. '이게 팀이야,' '우승은 어제 내린 눈' 같은 명언이 카메라 없을 때도 줄줄 나오나요?
카메라 없을 때 하신 말씀 중 지금까지 기억하는 건 '우린 좋은 팀이 아니라 훌륭한 팀이다. 좋은 팀은 돈 주고 선수를 사오면 되지만 훌륭한 팀은 인성까지 있어야 한다' 였어요. 그 말이 저에게 모토로 박혔거든요. 지도자를 하게 되면 훌륭한 팀을 만들어야겠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 정리해보면 인격적으로 감독 사이에 차등이 있다는 뜻은 아니고, 홍 감독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한다는 것 같군요.
네. 어떤 전술을 써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해 주시니까요. 가끔 헷갈리게 하시는 지도자가 계시거든요. 지시를 듣고 나서도 이렇게 하라는 건지 저렇게 하라는 건지. 근데 감독님은 명확하게 되는 것과 안 되는 걸 말씀해주시니까 선수들이 헷갈리지 않고 바르게 가는 것 같아요.
- 인터뷰 시점에 득점 공동 1위(25일 현재 단독 1위)입니다. 원래 우승만 신경썼는데 확정 후에는 개인상 욕심도 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강아지 임시보호 당시 울산현대 구단 소셜미디어(SNS) 게시물. 울산현대 인스타그램 스토리 캡처
당연히 매 시즌 많은 골을 넣어야 하지만 득점왕이라는 건 올해 완전 닫아놨었어요. 사실 정말 간절했던 득점왕은 작년이었어요. 그건 올해 우승컵만큼 간절했어요. 왜냐면 K리그 역사상 토종이 2년 연속 득점왕 받은 적은 없대요. 이건 내가 업적을 쓰는 거라 정말 간절했거든요. 근데 그게 무산되고 돌이켜보니까 제가 많이 부족했더라고요. 올해는 우승만 보고 달려왔는데. 우승하고 나서 거짓말처럼 제가 득점왕 레이스에 있는 걸 보면서 내 안의 욕심이 조금씩 나오더라고요. 어떻게 골을 넣을지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다행히 주변에서 다 도와주려고 해서 감사하게 노력하고 있어요.
- 축구 이야기는 아닌데, 최근 길 잃은 강아지를 구조하셨다면서요.
10월에 있었던 일인데. 제가 밥 먹고 와이프랑 산책을 하거든요. 그날따라 조금 오래 걷고 싶어서 길을 틀었어요.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사람들 무리에 섞여서 강아지가 같이 오는 거예요. 처음엔 주인 있는 강아지인가보다 싶었는데,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 강아지가 빨간불 앞에서 방황하다가 8차선 도로로 뛰어들려고 하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얼른 잡았죠. 그 자리에서 쓰다듬어주면서 주인이 올까 싶어 1시간 동안 기다렸는데 못 만났어요. 저는 강아지를 키워본 적도 없고 잘 모르는데, 지인의 도움으로 구청에 가서 어떻게 할지 물어보니 여기 유기견 박스에 넣고 가라시더라고요. 그리고 일정 기간 주인이 안 나타나면 안락사 된다고요. 진짜 깜짝 놀랐어요. 그 추운데 어떻게 놓고 가겠어요. 그래서 와이프와 우리가 임보(임시 보호)하자고 하고 맡게 된 거죠.
- 그럼 임보라는 말도 그때 처음 써 보셨겠네요?
그때 알았어요. 강아지를 데려오면서 부랴부랴 집과 사료를 사 와서 집 한켠에 뒀어요. 건강검진도 하고 중성화도 시키고. 원래 주인이 오시거나 새 주인이 생기면 건강한 강아지와 물건들 싹 드리려고. 그런데 주위의 좋은 주인을 찾아봐도 쉽지가 않았어요. 클럽하우스에 데려와서 키울까 싶어서 동료들에게도 다 이야기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진 않았죠. 처가에서 키우시는 걸로 결론이 났어요. 네? 장모님도 강아지 키워보신 적은 없어요.
- "주 서방, 갑자기 강아지라니 이게 뭔가" 하셨을 수도 있는데.
어이구, 엄청 좋아하세요. 홈캠 설치해 놓고 저와 와이프는 저녁마다 앉아서 그거 보고 있어요. 이름은 순해서 순돌이. 종이요? 병원에 물어보니까 발발이라고 하더라고요.
- 요즘 프로스포츠가 전반적으로 흥행하는데, 좋아하는 다른 종목이 있나요?
저 울산모비스 농구팀, 특히 함지훈 선수 좋아해요. 고등학교 때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거기 함지훈 선수가 계셨어요. 이미 유명한 선수였고 엄청 멋있더라고요! 그때부터 모비스 농구를 틈틈이 챙겨봤는데, 2019년 처음 울산으로 이적했을 때 모비스가 여기 팀이라는 걸 알았어요. 함지훈 선수는 아직도 계시고요(현재 KBL 최고령 선수이자 모비스 원클럽맨). 농구장 한 번 가야되는데 우리 경기와 겹쳐서 스케줄이 안 맞네요.
- 마지막으로 홍 감독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대신 질문해드리려고 하는데요.
궁금한 건 없고, 시즌 끝나면 감독님한테 사인 한 번 받아보고 싶긴 해요. 왜냐면 감독님과 별로 접점이 없어요. 장난도 안 치시고. 사인을 한 번 받아보고 싶어요. 수혁이 형이 저번에 감독님 20번 유니폼에 사인 받았는데 부럽더라고요.
- 팬인가요?
사실 저는 아직도 연예인 보는 것 같아요. 적응이 안 되고, 매일 훈련장에서 봐도 잘 못 쳐다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