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희(사진=MHN스포츠 DB)
(MHN스포츠 김인오 기자)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성적만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기회를 잡지 못하면 하부리그로 가야한다. 은퇴를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108명의 선택된 자들이 경쟁을 벌이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도 그렇다. 개인 종목이라 더 불꽃이 튄다.
KLPGA 투어에서는 108명 만이 모든 대회를 뛸 수 있다. 추천 선수 5~6명 정도가 있으니 정확히는 102명이다. 출전 기준은 명확하다. 한 시즌 상금 순위 60위 이내에 들어야 한다. 우승 경력이 있으면 2년 내지 3년간 시드를 얻는다. 박세리, 신지애, 안선주, 이보미 등 영구시드권자는 마음만 먹으면 평생 투어 무대를 누빌 수 있다. 다음 순위는 드림투어(2부 투어) 상금 순위 20위 이내 선수들이다. 나머지는 시드순위전 상위 순번부터 채워진다.
시드권자(영구시드권자, 드림투어 상위 20명 포함)가 모두 출전했을 경우, 시드순위전 16위까지 풀시드가 허락된다. 다만 여러가지 변수는 있다. 시드권자들이 모든 대회에 출전하지 않기 때문에 하위 순번이라도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게다가 올해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와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퀄리파잉에 도전하는 시드권자가 5명이나 된다. 만약 이들 중 3~4명 정도가 해외 진출에 성공하면 시드 순번 17위부터 30위 이내 선수들은 90% 이상 대회에 안정적으로 참가할 수 있다. '풀시드권자'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세희(사진=MHN스포츠 DB)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왔어요. 기적이란게 진짜 있더라구요."
올 시즌을 상금 순위 71위로 마쳐 시드 유지에 실패한 이세희는 '지옥의 시드전'을 치르고 돌아왔다. 지난 17일 끝난 정규투어 시드순위전 본선을 28위로 마쳤다. 90%, 어쩌면 그 이상을 출전할 수 있는 순위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기적'이 선물해준 소중한 성적표다.
4라운드로 진행되는 시드순위전 본선에서 이세희는 첫날 9위(5언더파)에 이름을 올렸다. 기쁨도 잠시. 2~3라운드에서 각각 1타씩을 잃었다. 순위는 52위까지 추락했다. 최종라운드에서는 2타를 줄였다. 공식 대회 첫 홀인원을 기록했고, 후반홀에서 나온 기록이라 백카운트 방식(동타일 경우 후반홀 성적을 기준으로 순차적으로 순위를 정하는 방식)에 따라 같은 타수 선수들 중 가장 순위가 높았다.
홀인원은 11번홀에서 나왔다. 이세희는 "우박을 동반한 비와 강풍으로 하루 종일 힘들었다. 성적도 좋지 않아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지금에서야 밝히는 거지만 사실 '포기' 상태였다"며 "11번홀에서도 홀인원인줄 몰랐다. 티샷한 볼이 보이지 않아 그린을 넘어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동반자들이 홀에 볼이 있다고 얘기해줬다. 공식대회 첫 홀인원이었지만 경쟁 중이라 마음 속으로만 기뻐했다. 홀인원 이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자신도 생겼다. 경기를 마친 후 어머니가 펑펑 우시는 모습을 보고 '됐구나'라고 확신했다. 기적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환하게 웃었다.
2021년 정규 투어 멤버가 된 이세희는 루키 시즌 성적 부진으로 2022년에는 드림투어로 밀렸다. 1년을 절치부심 후 다시 정규 투어로 돌아왔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에게 시드순위전은 너무나 잘 알아서 오히려 더 두려운 전쟁터였다.
이세희(사진=MHN스포츠 DB)
이세희는 "최종라운드 전날 진심을 다해 기도했다. 아직 나를 다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기회를 얻고 싶었다. 만약 떨어졌다면? 먼저 신의 존재를 부정했을 것이고, 골프를 떠났을 것이다. 그만큼 절실했다"고 말했다.
최종라운드 아침. 이세희는 곱게 접어놓은 편지를 꺼내어 읽었다. 트레이닝을 담당하는 골프퍼포먼스랩(GPL) 코치 선생님들의 편지였다. 함상규 대표를 비롯한 코치진들은 진심이 가득한 문구로 응원해줬다. 또 하나. 프로축구 제주FC에서 뛰고 있는 구자철 선수의 메시지를 가슴에 새겼다.
이세희는 "1년을 함께 지낸 쌤(선생님)들의 롤링페이퍼 속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셨다. 구자철 선수님은 긍정의 메시지를 보내줬다. 시합 내내 '나는 최고다,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쳤고, 결국 이뤄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세희는 12월 중순부터 해남에서 체력 훈련에 들어간다. 1월 초에는 전지훈련장인 미국으로 떠난다. '기적'을 '결실'로 만들기로 다짐했다는 그는 "제대로 몸을 만들고, 부족했던 쇼트게임과 퍼트 연습으로 내년 시즌을 대비할 생각이다. 이제는 우승할 때가 되지 않았나? 그래서 내년 목표는 우승이다. 그것도 많이 해보고 싶다"며 각오를 다졌다.
이세희(사진=MHN스포츠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