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데일리 = 이현호 기자] 팀원들의 신경전을 말려야 할 베테랑 선수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상대 선수와 충돌했다. 때에 따라 필요한 신경전이지만 이번엔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았다.
#기성용, 1분 1초가 아까운데 굳이 왜?
지난 2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FC서울과 수원 삼성의 하나원큐 K리그1 2023 37라운드가 열렸다. 올 시즌 마지막 슈퍼매치였으며, 수원 삼성의 ‘사실상 강등’이 확정될 수 있어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는 빅매치였다. 추운 날씨에도 3만 6천여 명이 상암벌을 가득 채운 이유다.
홈팀 서울은 후반 18분에 바사니에게 중거리 슛 실점을 허용해 0-1로 끌려갔다. 서울 홈 응원석은 침묵에 빠졌고, 수원 원정 응원석에서는 폭발적인 함성이 들끓었다. 벼랑 끝에서 한 줄기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서울과 수원의 명암이 극명하게 갈렸다.
서울은 마음이 급했다. 설상가상으로 후반 43분에 주장 오스마르가 거친 태클을 범해 다이렉트 퇴장을 당했다. 동점골과 역전골을 넣으려는 의지는 강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추가시간이 9분이나 주어졌으니.
추가시간 3분에 사건이 벌어졌다. 기성용이 수원 전진우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인플레이 상황도 아니었다. 프리킥을 빨리 차겠다는 의욕이 앞서 공 앞에 있던 전진우를 ‘방해자’로 인식하고 거칠게 밀었다. 전진우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양 팀 선수단이 이곳에 집결했다. 팔로세비치(서울)와 이상민(수원)이 충돌했고, 이들을 말리던 고승범(수원)은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선 채로 안면을 폭행당했다. 정훈기 서울 피지컬 코치가 그라운드에 난입해 고승범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VAR 판독 후 정 코치가 퇴장을 당했다. 정 코치는 판정에 불복해 심판에게 항의하다가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전 세계 모든 라이벌 경기에서 신경전은 자주 발생한다. 하지만 후반 막판에 지고 있는 홈팀이 신경전을 유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어떻게든 시간을 아끼고 역전하기 위해 상대의 도발을 참고 넘어가는데, 서울 최고참 기성용은 스스로 촉매제가 됐다. 얻은 게 하나도 없다.
결과는 어떠한가. 추가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서울은 백종범 골키퍼까지 코너킥에 가담해 동점을 노렸지만 서울은 슛 한 번 제대로 때리지 못한 채 0-1로 졌다. 라이벌 수원 팬들은 상암을 집어삼킬 듯이 ‘나사나수(나의 사랑 나의 수원)’ 응원가를 떼창했다. 서울 팬들은 고개를 숙인 채 황급히 상암을 떠났다.
기성용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프리킥을 속행했다면 어떠했을까. 서울 홈팬들이 고개를 떨구지 않았을 수 있다. 상암이 수원 응원가로 뒤덮이지 않았을 수 있다. 슈퍼매치가 스포츠 뉴스를 벗어나 사회 뉴스면에 ‘불필요한 폭행’으로 얼룩지지 않았을 수 있다. 가장 큰 피해는 서울이 입었다.
#김진수, 또 경고받아 ‘울산 원정’ 못 뛰어
같은 날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전북 현대와 광주FC가 맞붙었다. 다음 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출전권을 두고 4위 전북과 3위 광주가 힘겹게 싸웠다. K리그 3위까지 ACLE에 나갈 수 있기에 홈팀 전북은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다.
전북은 안현범, 송민규의 연속 득점으로 전반에 2-0 리드를 잡았다. 후반전 주도권도 전북이 이끌었다. 큰 변수가 없는 한 전북의 승리가 예상되는 흐름이었다. 다음 경기가 울산 현대 원정인 점을 고려하면 남은 시간 부상자 없이 마무리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후반 35분에 김진수(전북)가 티모(광주)와 충돌했다. 둘의 경합 과정에서 김진수가 넘어졌는데 티모가 김진수의 발목을 손으로 잡아끌었다. 김진수는 티모의 가슴을 밀쳤고 티모도 맞서 대응했다. 참고로 경기가 중단된 상황이 아니다. 광주 선수들이 전북 진영으로 올라가 역습하는 와중에 이 둘은 하프라인 부근에서 얼굴을 맞대고 노려봤다.
공이 라인 밖으로 나가자 주심은 티모와 김진수를 불러 경고를 줬다. 김진수는 이 경고 탓에 경고 5장이 누적되어 최종전 울산 현대전에 결장한다. 상당히 치명적이다. ACLE 진출을 위해 울산을 꺾어야만 3위권에 올라설 수 있지만, 전북 핵심 수비수 김진수는 이 경기를 TV로 봐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진수는 자신이 경고를 받자 더 흥분해서 티모 가슴을 또 밀었다. 티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발라당 넘어져 심판을 바라봤다. 주심은 김진수에게 추가 경고를 주지 않고 넘어갔다. 김진수는 홈 최종전에서 퇴장을 당할 수 있었다.
김진수가 티모의 도발을 무시해 경고를 안 받았다면 ‘현대가 더비’에 출전해 3위권 도약에 힘을 실을 수 있었다. 이미 우승을 확정한 울산은 상대적으로 동기부여가 떨어져 있는 상황. 전북이 울산을 이기고, 광주가 포항을 이기지 못하면 전북이 3위로 ACLE에 나가는 상황. 주전 선수 한 명 한 명이 귀중한 시점에서 김진수가 스스로 울산전 결장을 초래했다.
#수원 이종성, 서울 고요한도 '투 머치 흥분'
슈퍼매치에서 또 다른 베테랑 이종성도 경고를 받았다. 이종성은 전반 22분 기성용을 거칠게 태클해 옐로카드를 받았다. 이로써 경고 5장이 누적되어 38라운드 최종전인 강원FC전에 뛸 수 없다. 수원-강원 경기에서 패배한 팀은 2부리그로 다이렉트 강등되는데, 수원은 주장 이종성 없이 강원을 상대해야 한다.
하프타임에 교체 아웃된 고요한도 이슈의 중심에 있다. 앞서 언급한 후반 추가시간 난투극 도중 고요한이 깜짝 등장했다. 이 충돌 장면에서 고요한이 고승범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20여 명이 검은 패딩을 입고 뒤엉켰기에 중계화면으로는 누가 누군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팬 직캠 영상 등에는 고요한이 고승범과 접촉한 게 찍혔다.
한국프로축구연맹 관계자는 “서울-수원 경기에서 벌어진 충돌을 세세히 조사할 예정이다. 폭행과 관련된 선수·코치를 모두 파악해 사후징계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귀띔했다. 고승범은 “축구선수 생활하면서 주먹으로 처음 맞아봤다.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머리를 왜 잡혀야 하는지 당황스럽다”고 하소연했다. 김진규 서울 감독대행은 “어린 팬 등 많은 분들이 경기장에 찾아왔는데, 굳이 그런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며 고개 숙였다.
경험 많은 베테랑이 대우받는 이유 중 하나는 위기 대응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팀이 힘든 상황에서 멘탈이 흔들린 후배들을 이끌고 위기를 파헤쳐 나가길 기대받는다. 하지만 지난 주말 K리그에서는 베테랑들이 위기를 자초해 팀에 피해를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