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안 되나’라는 공허함은 씻었는데 이랜드에 대한 미안함은 여전했다.”
부임 첫해 김천 상무를 프로축구 1부리그로 끌어올린 정정용 감독(54)은 멋쩍게 웃었다. 막판 역전극으로 2부에서 우승한 행운은 기쁨을 불렀지만 3년 동안 승격을 이루지 못한 채 떠난 서울이랜드는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8일 경북 문경 국군체육부대에서 만난 정 감독의 표정은 기쁨 반, 미안함 반이었다.
지난 26일 김천종합운동장. 김천은 2부리그 시즌 최종전에서 이랜드를 1-0으로 꺾고 승점 71점(22승5무9패)을 기록했다. 부산 아이파크-충북 청주전은 부산이 1-0으로 앞선 채 인저리타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산이 이기면 2부 우승은 승점 72점이 되는 부산의 몫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종료 1분 전 충북의 동점골이 터졌고 경기는 1-1로 끝났다. 부산은 승점 70점(20승10무6패)에 그쳤고 다 잡은 우승컵을 김천에 내줬다. 정 감독은 “2019년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한 뒤 끊긴 것처럼 보인 행운이 나에게 다시 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정 감독이 김천에 부임한 것은 지난 6월. 당시 6위인 김천은 10경기에서 8승을 챙기며 1위에 올라섰고 그게 막판 우승하는 밑거름이 됐다. 부임 6개월 만에, 최종전에서 남의 손에 의해 되찾은 우승컵. 정 감독은 “행운”이라며 몸을 낮췄다.
이랜드 사령탑을 그만둔 뒤 모교 경일대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김천의 제안을 받았다. 정 감독은 “제한된 공간에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김천에서라면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임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선수들과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정 감독은 “내가 연령대별 대표팀 감독으로 겪은 선수들이 많다”며 “선수들은 신뢰가 쌓이면 뛰게 마련이다. 군인인 선수들 심정과 상황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대화를 통해 신뢰를 다졌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든 프로선수로서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강조하면서 선수단 의식을 바꾼 게 주효했다”고 덧붙였다.
경일대에는 엘리트 축구팀이 없다. 정 감독은 “지도자로서 욕심을 내려놓고 학생들 진로만을 고민하며 가르쳤다”며 “학생들과 관련된 많은 걸 챙기고 관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프로 감독은 선수뿐만 아니라 가족, 코치, 구단 직원, 팬, 에이전트, 심판, 미디어 등 다양한 인사들과 원만하게 지내야 한다. 그래서 유럽에서 축구팀 감독은 코치가 아닌 매니저로 불린다. 정 감독은 “이랜드에서 인프라 구축과 훈련만 열심히 했지 매니저 역할을 잘하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매년 절반 이상 바뀌는 선수들로 새로운 팀을 꾸려야 하는 게 김천 감독이 짊어진 숙명이다. 김천은 오는 12월 신입 선수 20명을 모집한다. 정 감독은 “프로에서 많이 뛴 선수들을 우선 뽑겠다는 기준을 마련했다”며 “상무는 거쳐 가는 팀이 아니다. 프로선수로서 자세를 유지하겠다고 다짐하는 선수들만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천은 1부에 올라가도 바로 2부로 떨어지곤 했다. 정 감독은 “1부 리그에서는 잔류가 현실적인 목표다. 대한축구협회(FA)컵에서는 우승을 노리겠다”며 “신입 선수들이 신뢰와 존중으로 단단해진 분위기에 녹아든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김천에서 열심히 하면 국가대표에 뽑힐 수 있고 더 좋은 팀으로 갈 수도 있다”며 “정신력과 간절함으로 팀 전체가 하나가 될 때 선수도, 팀도 잘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