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스포츠 무대에선 고려대학교 87학번이 큰 화제를 모았다.
프로축구와 프로야구, 프로농구 세 종목에서 정상에 오른 지도자들이 모두 고려대 87학번 동기이기 때문이다.
체육교육학과 87학번인 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54)이 지난해에 이어 K리그1 2연패로 빛나는 지도력을 발휘했고, 법학과 87학번인 안양 정관장 김상식 감독(55)과 법학과 87학번인 LG 트윈스 염경엽 감독(55)도 리그 정상에 오르며 명장에 올랐다.
특히 홍 감독은 내년에도 울산이 우승에 도전할 전력을 갖추고 있으니 새로운 왕조 건설도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울산 구단이 지난해 여름 홍 감독과 3년 재계약을 맺으면서 국내 지도자로는 사상 첫 연봉 10억원을 안긴 것에서도 같은 기대감이 묻어난다.
그런데 홍 감독은 지난 25일 인천의 한 호텔에서 기자와 만나 “지금은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생각할 시간이 됐다”며 욕심을 경계했다.
울산이 다시 한 번 정상을 수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랜 기간 명문으로 자리매김하려면 한 걸음 물러설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읽혔다. 홍 감독은 “분명 팬들은 내년에도 우승이 목표여야 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라며 “당연히 매년 우승할 수 있으면 좋다. 그렇지 않다면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의 고민은 울산의 선수단 구성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탁월한 기량을 갖춘 이청용(35)과 김태환과 김기희(이상 34), 김영권과 주민규(이상 33), 조현우(32) 등 베테랑들이 중심축을 잡고, 젊은 피들이 조화를 이뤘다.
이상적인 형태이지만 내년 1월 아시안컵이 열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울산은 12월 12일 일본 가와사키 프론탈레와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조별리그 6차전을 끝으로 시즌을 마치는데, 주축인 국가대표 선수들이 한 달 만에 아시안컵에 참가해야 한다. 아시안컵을 마치면 곧바로 내년 2월 ACL 16강과 3월 K리그1 개막까지 잇따르니 쉴 틈이 없다.
홍 감독은 “울산에선 5명(김영권·김태환·설영우·정승현·조현우) 안팎의 선수가 아시안컵에 차출될 것을 각오하고 있다”면서 “내가 내년에도 우승을 욕심낸다면 이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지 않고 달려야 하는데, 그러면 사고가 난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준비하던 2001년 겨울 휴식 없이 대표팀을 누비다가 피로골절을 앓았다. 그는 “내가 그런 경험이 있는데 선수들에게 똑같은 요구를 할 수 있겠느냐”면서 “나이가 많은 김영권이 걱정된다. 올해도 이미 50경기를 넘게 뛰었다”고 말했다.
하필이면 아시아축구연맹(AFC)이 2023~2024시즌부터 ACL를 추춘제로 바꾼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년에는 시즌이 끝난 뒤 12주를 쉬면서 개막을 준비할 수 있었으나 이젠 8주 만에 속전속결로 해결해야 한다. K리그1 우승을 노릴 수 있는 리딩 클럽들의 공통된 고민이기도 하다.
홍 감독은 “올해를 기점으로 12주가 아닌 8주에 선수들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 필요가 있다”면서 “나도 올해 우리 선수들의 몸 상태를 체크한 뒤 휴가기간부터 훈련 스케줄을 만들어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홍 감독이 내년 우승을 고집하지 않는 것은 라이벌들과 비교해 이적료에 큰 돈을 쓸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도 감안해야 한다. 우승컵을 들어올린 올해는 시즌 도중 국가대표 미드필더 박용우(30·알아인)를 내보내면서 이적료 지출보다 수입이 많았을 정도다. ‘윈 나우’를 욕심내는 것보다 미래를 대비하는 리빌딩으로 고민이 기우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혜택을 받은 설영우(25)와 엄원상(24) 등은 기회만 생긴다면 해외 진출에 도전할 의지도 있다는 점에서 전력 보강도 고민할 때가 됐다.
홍 감독은 “젊은 나이에 유럽 진출을 서둘렀다가 실패한 선수들이 꽤 있다”며 “두 선수에게도 적절한 조언을 해주려고 한다. 남들보다 (우승)목표를 빨리 이룬 터라 내년 준비를 서두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앞으로 구단 그리고 코칭스태프와 함께 2024년 울산의 방향을 빨리 결정짓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