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데일리 = 최용재 기자]냉정한 프로세계. 시간이 갈수록 낭만은 사라지고 있다. '원 클럽 맨'은 찾아볼 수 없고, 이전 팀을 상한 예우보다는 비난을 퍼붓는 일이 더 자주 발생하는 지금.
하지만 낭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치열한 승부의 세계라고 하더라도, 그 승부를 뛰어넘는 따뜻함을 지닌 곳이 분명히 존재한다. 지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웨스트햄'이 그렇다.
오늘 새벽(한국시간) 웨스트햄은 아스널과 2023-24시즌 잉글랜드 카라바오컵 4라운드를 펼친다. 장소는 웨스트햄의 홈구장인 런던 스타디움. 낭만이 살아 숨쉬는 경기다. 왜? 아스널의 데클란 라이스가 런던 스타디움으로 오기 때문이다.
라이스가 누구인가. 지난 시즌까지 웨스트햄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였다. 에이스이자 주장이었다. 웨스트햄 유스 시절을 합치면 지난 시즌까지 이곳에서 10년을 보낸 라이스다.
이런 라이스가 지난 시즌을 끝으로 웨스트햄과 이별한 뒤 아스널로 이적했다. '원 클럽 맨'이었던 라이스의 이적. 웨스트햄 팬들 입장에서는 분노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쉽지만, 아쉬운 마음을 감춘 채 아름답게 보내줬다. 라이스가 웨스트햄을 위해 한 일을 알고 있고, 라이스가 더 높은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알기에, 사랑하기에 이별을 한 것이다.
라이스가 남긴 마지막 선물도 감사히 받았다. 구단 최초의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우승컵. 그리고 영국인 최고 이적료인 1억 500만 파운드(약 1731억 원). 라이스는 부와 명예를 모두 남겨놓고 떠났다.
웨스트햄을 떠난 후 처음으로 라이스가 런던 스타디움을 찾는다. 분명 그의 신분은 '적'이다. 웨스트햄이 무너뜨려야 하는 아스널의 핵심 선수다. 그렇지만 웨스트햄 선수들은 라이스를 여전히 사랑한다. 이런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웨스트햄 팬들은 대동단결했다.
웨스트햄 팬들은 이런 방식으로 라이스를 맞이하려 한다.
"라이스에게 야유를 보낸다면, 그것은 웨스트햄의 수치입니다. 라이스는 박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선수입니다. 라이스가 웨스트햄을 위해 한 일과, 라이스가 웨스트햄에서 이룬 것들, 라이스는 웨스트햄에서 환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데이비드 모예스 웨스트햄 감독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이스가 이곳으로 오면 우리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라이스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다. 라이스는 웨스트햄의 훌륭한 구성원이었다. 팀을 잘 이끌었고, 주장으로서 흠잡을 데 없는 선수였다. 우리는 라이스가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라이스는 마지막까지 웨스트힘을 위해 100%를 쏟았다. 이것만으로도 라이스는 이곳에서 환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라이스가 팀을 떠난 후 본 적이 없다. 라이스가 경기에 출전할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라이스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라이스가 웨스트햄을 떠나면서 웨스트햄 팬들에게 전한 편지가 있다. 이전에 한 번 소개한 적 있지만, 다시 한번 소개한다.
믿을 수 없는 10년이 지났습니다. 10년이 끝나다니 이 역시 믿을 수 없습니다.웨스트햄은 경기장 안에서도, 밖에서도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웨스트햄과 작별 인사는 쉽지 않습니다. 지난 시즌 프라하에서 믿을 수 없는 뜨거움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한 사람으로서, 또 축구 선수로서, 또 주장으로서 많이 성장했습니다.제가 주장 완장을 찬 그날부터, 저는 열정과 웨스트햄 소속이라는 자긍심 외에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주장으로서, 유럽대항전 우승 트로피를 전달한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습니다.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웨스트햄 팬들과의 관계, 저와 제 가족들에게 전부였습니다. 제가 웨스트햄에 처음 도착한 그날부터 당신들은 지금처럼 저를 대해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웨스트햄의 모든 감독님들, 코치님들, 스태프들, 직원들, 팀 동료들. 덕분에 웨스트햄이 얼마나 특별한 클럽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날들, 그리고 놀라운 추억들. 감사합니다. 모두 사랑합니다.이런 선수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적으로 만난다고 해도.
[최용재의 매일밤 12시]는 깊은 밤, 잠 못 이루는 축구 팬들을 위해 준비한 잔잔한 칼럼입니다. 머리 아프고, 복잡하고, 진지한 내용은 없습니다. 가볍거나, 웃기거나, 감동적이거나, 때로는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잡담까지, 자기 전 편안하게 시간 때울 수 있는 축구 이야기입니다. 매일밤 12시에 찾아갑니다.